당신은 이미 AI에게 지능을 빼앗겼다


 요즘 아주 많은 사람들이 AI를 사용한다. 대학생인 내 주변 사람들은 대다수 나와 같은 대학생이거나 혹은 노동자로서 이제 막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인데, 적어도 내 주변인들은 전부 쓰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속해있는 ‘프로그래밍’, ‘개발’ 분야의 특성도 있으나, 개인적인 관찰 그리고 외부 자료들에 의하면 특별히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AI가 널리 사용되는 듯하다.
물론 나도 AI를 사용한다. 사실 ChatGPT를 위시한 생성형 AI가 막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타고난 반골 기질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과 경계심 때문에 꽤나 오랫동안 AI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주변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사용하게 되었다. 그 선택을 지금의 시점에서 돌아볼 때, AI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 자체를 오판이라 여기진 않지만 적어도 사용하기에 앞서 ‘내가 쓸 도구’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ChatGPT없이’ 오직 나만의 힘으로.

누군가 내게 AI에게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예전에는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답했겠지만, 지금은 ‘생각할 기회를 뺏어가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AI가 대중화되면서 우리는 ‘생각할 기회’를 빼앗겼다.
최근에는 AI가 제일 주목받는 경향이 있지만, 지금까지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가 얻은 도구는 AI뿐이 아니다. 인터넷 검색 엔진, 전자 전화번호부, 자동차, 비행기, 엘리베이터, 에어컨,… 이 모든 것이 과거 우리가 얻은 도구이다. 그러나 AI라는 도구가 과거에 등장했던 도구 —인터넷 검색 엔진이나 전자 전화번호부—가 등장한 것과 무엇이 질적으로 다르냐하면, 그것은 바로 ‘문제 해결’을 지금까지 등장했던 그 어떤 도구보다도 더 많이 대리해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문제를 푸는데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동반된다:

  1. 상황을 분석하여 문제를 정의한다.
  2. 알고있는 정보와 조합하여 가설을 세운다.
  3. 세운 가설을 실험/시뮬레이션한다.
  4. 성공했으면 문제해결을 종료하고 그렇지 않으면 2번으로 다시 돌아간다.

지난 날의 도구들은 고작해야 ‘정보를 즉각적으로 얻는데’ 도움을 줄 뿐이었다. 운이 좋으면 내가 겪고있는 현재의 상황과 완전히 동일한 사례를 인터넷에서 찾아 그 해결 방법을 따라할 수도 있었지만,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으므로 결국 ‘직접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 얻은 새로운 도구, AI는 어떠한가?
AI를 사용하면, 우리는 무려 ‘문제를 정의’하는 첫 번째 단계조차 거치지 않아도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이 점이 두드러지는데, 이를테면 에러 메세지를 읽지도 않고 그저 복사 붙여넣기하거나, 스크린샷 촬영하여 그대로 AI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아주 쉽고, 편리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어떤 문제들은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진 않지만).
그렇게 하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음 번에 같은 혹은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높은 확률로 혼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 해결은 했지만, 내 문제 해결 능력은 상승하지 않은’ 것이다.

부끄럽지만 여기서 내 얘기를 조금 해보고 싶다. 나 또한 남들과 같이 편한게 좋고 게으른, 그야말로 인간의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AI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대중들에게 공개되고 나서, 인간의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나 또한 결국 AI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들었고, ‘생각할 기회’들을 많이 빼앗겼다. 그 결과 나의 ‘문제 해결 능력’은 스스로 체감이 될 정도로 예전보다 약해졌다. 이번에 직접 경험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지만 문제 해결력은 근육 같은 것이라서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심지어 나는 아직 학생이고, 한창 배워야 하는 시기인데 어리석게 AI를 사용한 탓에 딱 적기에 기회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진정한 학습은 무언가를 보고 읽을 때와 같이 입력(input)할 때가 아니라, 출력(output)하기 위해 사고할 때 이루어진다. 이것은 뇌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로, 우리가 출력을 하고자 사고할 때 비로소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가 생성 혹은 강화되어 신경망이 재구성된다. 그리고 그 신경망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장기 기억이 되어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시냅스는 관련 기억을 자주 쓸 수록 강해지고, 사용하지 않을 수록 약해진다. 그러므로 AI가 문제를 대리 해결해주는 것은, 뇌과학적으로 ‘시냅스의 생성, 강화 기회를 빼앗긴다’거나 ‘신경망을 약화시킨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편안함을 좇는 것이지만,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 본성을 거스를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우리의 가능성은 점점 좁아진다’. 최근 마이클 이스터(Michael Easter)라는 사람이 쓴 ‘편안함의 습격(The Comfort Crisis)‘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인류에게 있어 도전 과제를 빼앗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준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AI를 콕 집어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간 AI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부분들을 보다 명료한 언어로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경향이 있어서, ‘편한 도구’보다 ‘더 편한 도구’가 등장해버리면 ‘편한 도구’가 그때부터는 ‘불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더 편리한 도구가 등장하면 등장할 수록 우리의 comfort zone은 점점 좁아지고, 불편함을 느끼는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comfort zone 안에서만 머무르다 보면 그 편안함에 익숙해져 점점 그 범위를 벗어나는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이 잃은 능력 중 하나는 배고픔을 견디는 능력이다. 과거에는 식량을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나 공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수십 시간을 견딜 수 있었지만, 현대인들은 하루 세 끼 밥 먹을 시간이 될 때마다 배고픔을 해소하는데 익숙해져 더 이상 그만큼은 버틸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편안함’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내재된 능력을 잃어버린다. 자신에게 본래 내재되어 있던 능력을 되찾으려면 comfort zone을 벗어나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태에 익숙해지려 노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성장 —자신의 잠재력을 되찾기—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불편함과 고통을 감수해야함을 인정하고, 편안함을 좇는 인간의 본능을 거슬러야만 한다.

그리고 AI를 비판적으로 사용해야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AI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여러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인데, ‘잘 알고 있는 놈이 AI를 잘 쓴다’. AI를 사용하는 건 궁극적으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함인데, 생산성을 높이는 측면에 있어서도 결국엔, ‘잘 알고 있어야’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질문해야할지 모르는데 질문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판단하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 거리 떠올리기’나 ‘AI의 답변을 판단’하는 등 보다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려면 관련된 신경망이 ‘이미’, ‘강하게’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마치 포인터나 바로가기의 상태로 있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지만 사실 텅 비어있는’ 그런 류의 지식은 결코 사용할 수 없다. 즉, 사고(thinking)를 하는데 있어 벼락치기는 불가능하다. 이렇듯 모든 것을 AI에 맡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AI 사용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1. AI는 과거의 그 어떤 도구들보다 ‘문제 해결’에 있어 아주 많은 부분을 대리해주는 도구라는 점을 인지해야한다.
  2. 이 ‘편안하고 좋은’ 도구를 사용하면 할수록 나는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는 점 또한 인지해야한다.
  3. 이 사실에 기반하여 AI를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지금 나의 목적에 따라 용도를 철저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크게 ‘생산’ 혹은 ‘학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데, 비록 처음에는 많이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불편함을 감수하는 용기’를 내달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배움의 단계에 있는 학생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어찌보면 이런 ‘배움의 적기’에 있는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AI 시대를 맞게 된 것은 상당히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물론, 현재 대학생인 나도 포함된다).

본래 내 생각을 짜임새 있게 정리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었으나 내가 온라인에 이 글을 투고함으로써 다른 누군가가 AI 사용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나는 진심으로 남들이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

ps. 이 글의 제목은 ChatGPT가 지어줬습니다. 최대한 자극적으로 지어달라고 주문했어요. 나는 문예창작과나 신문방송학과가 아니므로 제목 짓는 걸 AI에게 대리 맡기는 것은 옳은 AI 사용일 것입니다. 우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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